영화 피아니스트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나치의 유대인 차별과 탄압으로 바르샤바가 점령되는 배경을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오늘은 실화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 <피아니스트>의 주인공 블라디 슬로프 슈필만과 그를 구해준 호젠펠트 장교에 대해 자세히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피아니스트 나치의 유대인 차별
제55회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영화 <피아니스트>가 오는 2024년 6월 25일 다시 한번 극장을 찾아왔습니다. <피아니스트>는 유대계 피아니스트였던 블라디 슬로프 슈필만의 회고록을 바탕으로 작품이 탄생했습니다. 홀로코스트는 2차 세계 대전 도중 히틀러의 나치가 주도하여 무려 600여만 명의 유대인을 살해한 인류 역사상 최악의 사건 중 하나입니다. 실제 폴란드인이자 홀로코스트 생존자인 감독 로만 폴란스키가 스필만의 회고록에 자신의 경험을 덧붙여 창조한 영화입니다. 슈필만은 1945년 전쟁이 끝나고 피아니스트로 활동하였으며 2000년 88세의 나이로 사망하셨습니다. 이 작품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세계에 극한의 상황 속에 내던져진 한 예술인의 모습을 통해 인간의 존엄성과 생존, 예술에 대한 갈망 등을 진중한 태도로 그려냈습니다. 일반적으로 홀로코스트 문제를 다루는 영화들이 모든 유대인은 희생양으로, 모든 독일인은 전범으로 묘사하는 것과 달리 이 영화는 전쟁의 품 안에 존재하는 다양한 인간 군상을 균형 있게 비추고 있습니다. 영화 <피아니스트>에 나오는 주인공을 슈필만을 소개해 보자면 그는 1911년 폴란드 소스노비에츠에서 출생했으며 바르샤바 쇼팽 음악학교에서 피아노를 배워 그 후 베를린 예술원에서 피아노 작곡을 배웠습니다. 그는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1933년 바르샤바로 돌아와 피아노 연주자와 작곡가로 활동하며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으며 1935년 국영 폴란드 라디오의 피아노 연주자가 되었습니다. 연주자 및 작곡가로 폴란드는 물론 세계를 누비며 왕성한 활동을 했고 그가 작곡한 곡 중 300여 곡은 지금 이미 폴란드인 다수에게 널리 사랑받고 있는 곡들로 알려져 있습니다. 1946년 출간된 회고록 '도시의 죽음'은 독일 점령 때 바르샤바에서 생활한 경험을 바탕으로 작성되어 있으며 1998년 영어판으로 '피아니스트'로 출판이 되었습니다. 이를 토대로 2002년 로만 폴란스키 감독이 동명의 영화를 만들었고 2003년 개봉되어 올해 다시 재개봉하게 되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2차 세계대전 당시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블라덱 슈필만은 유명한 피아니스트였습니다. 라디오 방송국에서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는 도중 나치의 공습이 시작되며 건물이 무너져 내리자 이내 도망쳐 나오게 됩니다. 나치는 바르샤바를 점령하며 유대인들을 핍박하기 시작합니다. 유대인들은 유대인이라는 표시를 위해 완장을 차고 다녀야 하며 공공장소와 공원의 벤치, 인도로도 걸어 다닐 수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거리에는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는 사람들로 거리에 시체가 즐비해지게 됩니다. 그렇다 보니 유대인 집안인 슈필만 가족 또한 삶이 어려워져 갔지만 영국과 프랑스의 선전포고 방송을 들은 슈필만 가족은 곧 자신들도 나치로부터 해방될 것이라 기뻐했지만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은 폴란드에 군사적 개입을 하지 않았고 시간이 지날수록 유대인에 대한 차별과 탄압은 계속되며 더 심각해졌습니다. 나치는 바르샤바 내에 대규모 게토를 만들어 그곳에 유대인들만 따로 격리하게 됩니다. 슈필만 가족도 다 같이 게토로 이주하게 되고 매일 마음을 졸이며 삶을 이어 나가게 됩니다. 그곳에서는 나치의 대량 학살과 만행은 점점 더 심해지게 되다 보니 슈필만 가족도 가난을 넘어 음식조차 구매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급기야 자기 피아노조차 헐값에 팔게 됩니다. 나치는 유대인들을 수용소에 보내기 시작하며 슈필만 가족들도 수용소로 가는 열차로 끌려가게 됩니다. 그런데 유대인 경찰인 이츠하크가 슈필만만 대열에서 따로 끌어내 살려주며 빨리 도망가라고 말하게 됩니다. 그렇게 슈필만은 가족들과 생이별하고 혼자가 됩니다. 다시 게토 수용소에서 생활하던 슈필만은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그곳에서 탈출하게 됩니다. 친구의 도움을 받아 도피하며 살았었지만 결국 이웃에게 들통이 나게 되어 비상 주소로 도망을 치게 됩니다. 그 집은 예전에 슈필만이 좋아했던 도로타 부부의 집이었고 그들 부부는 슈필만의 작은 은신처를 마련해 주게 됩니다. 숨어지내던 슈필만은 본인의 도피자금을 안텍이라는 사람에게 맡겼었는데 그 사람이 배신해 돈이 없어 먹을 것 없이 힘들게 지내던 중 독일군이 공격해 그곳에서 나오게 됩니다. 슈필만은 폐허가 된 병원에서 숨어 살다가 독일군이 건물에 불을 지르고 대대적인 수색을 하기 시작합니다. 다시 도망자가 된 슈필만은 폐허가 된 건물 다락방에서 숨어지냈고 추위와 공복에 시달리며 견뎌내야만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슈필만은 나치 장교 호젠 펠트에게 발각되게 됩니다. 호젠 펠트는 슈필만에게 어디에 사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 물어보자 슈필만은 피아니스트였다고 대답해줍니다. 그러자 호젠 펠트는 옆방에 놓여 있는 피아노를 연주해 보라고 했고 슈필만은 생의 마지막 연주라고 생각하며 혼신을 다해 피아노를 연주하게 됩니다. 슈필만의 연주에 감동한 호젠펠트는 그가 유대인인 것을 알았지만 그를 처형하지 않고 살려주게 되며 굶주린 그에게 먹을 것을 챙겨줍니다. 전세는 독일군에게 불리하게 기울어지자 호젠펠트 장교는 마지막으로 슈필만을 찾아가 독일군의 철수 사실을 알리며 식량과 자신의 코트를 벗어 주고 가게 됩니다. 그렇게 호젠 펠트는 독일군과 함께 바르샤바에서 떠나게 됩니다. 전쟁이 끝난 후 다시 피아니스트로 활동하는 슈필만은 동료로부터 수용소로 끌려간 호젠펠트의 소식을 듣게 됩니다. 슈필만은 뒤늦게 그를 찾아가 보았지만 결국 두 사람은 다시 만나지 못한 채 이후 그의 사망 소식을 듣게 됩니다. 영화는 슈필만이 오케스트라에서 협연하는 모습으로 막을 내리게 됩니다.
호젠펠트 장교
영화에 등장하는 독일군 호젠펠트 장교는 원래 교사로서 따뜻하고 지적인 성품을 지녔었으며 평소 독일군의 잔혹 범죄에 대해 경악하며 진심으로 슬퍼하고 반성한 인물이라고 합니다. 호젠펠트는 수많은 유대인과 폴란드인을 구했으며 본인이 할 수 있는 최대한 피해자들을 구조했다고 합니다. 그는 1945년 소련군에게 붙잡혀 고문을 당한 뒤 후유증으로 1952년 사망하게 됩니다. 슈필만은 평생 그를 구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했다고 했습니다. 이후 호젠펠트 장교는 슈필만의 아들에 의해 이스라엘 홀로코스트 기념관에 '유대인을 구한 의인'으로 선정되었습니다. 왜 히틀러는 유대인을 학살했었는지 찾아보니 당시 유럽 사회의 반유대주의적인 성향과 히틀러의 개인사, 정치적 이유에서 유대인 말살 정책을 펼쳤다고 합니다. 정치적인 이유가 가장 크게 작용했었는데 1929년 대공항을 살기 힘든 시절 독일 민주주의를 내세우며 히틀러가 등장했습니다. 그 후 히틀러는 경제와 언론을 장악하고 있던 유대인들이 독일 경제에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하며 혐오하였습니다. 그렇게 유대인 탄압은 좌파와 우파, 일반 시민계층까지 만족시킬 수 있는 정치적 카드였기에 나치당은 전 국민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숨겨진 히틀러의 개인사가 있었는데 히틀러는 젊은 시절 미술 대학을 진학하기 위해 원서를 제출했었는데 그를 탈락시킨 사람이 유대인 교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전 자신에게 성병을 옮겼던 여성이 유대인 창녀이며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유대인에 대한 안 좋은 감정이 쌓여갔다고 합니다. 사실 유대인들은 기독교인들에게 금지된 일명 이자 놀음을 통해 많은 부를 축적하고 이자를 엄청나게 수취하며 구두쇠 기질이 강했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자국의 부유층이 된 유대인들을 힘들게 살아온 유럽인들이 안 좋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 사회 전반에 반유대주의적 성향이 팽배해지게 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