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영화 1980 518 민주화 운동은 그동안 저희가 알지 못했던 1980년대 화평반점 중국집이 직접 겪은 실화 이야기와 그 당시 광주 시민들의 가슴 아픈 이야기를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영화 1980 518 민주화 운동
3월 27일 개봉된 영화 <1980>은 2021년 전라도 광주에서 시작된 40년 전통의 낙지 짜장 중국집 [화평반점]의 이야기로 전개됩니다. 평범한 시민들의 이야기를 통해 1980년 5월 18일부터 10일간의 암울한 여정을 그리며 그들의 삶과 추억이 깃든 이야기를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올 초 흥행작이었던 영화 <서울의 봄>에서 그린 1979년 12.12 군사 반란 그 이후의 대한민국에 닥친 비극을 다루고 있습니다. <서울의 봄>에 등장하는 전두광이 집권한 대한민국은 어떤 나라인지 어떤 현실을 보여줬는지 영화를 통해 그 당시 민중의 삶에 대해 알 수 있는 영화이기에 꼭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러닝타임은 총 99분이며 강승용 감독이 전체적인 기획을 맡아 제작되었습니다. 강승용 감독은 1995년부터 영화 미술 감독으로 활동했으며 대표 작품으로는 <왕의 남자>, <사도>, <평양성> 등 다양한 유명 작품으로 활동했습니다. 강승용 감독은 5.18 사태를 취재하면서 이 이야기를 가지고 진실을 꺼내고 싶어 했습니다. 이게 현실이 맞느냐는 의문점이 들었고 그러면서 진실이 뭔지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추적했으며 피해자분들 생존자의 얘기를 들으면서 어떻게 40년 동안 그 이야기를 가슴에 묻어두고 사셨을까 생각했다고 합니다. 영화 <1980>의 줄거리를 살펴보자면 1980년 5월 17일 평생 중국 음식점에서 수타면을 뽑던 철수 할아버지는 드디어 본인의 중국집 [화평반점]을 개업하게 됩니다. 이 가게는 유신 정부의 혼분식 장려로 번창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2대 주인장으로 성장한 아이는 자신의 손자 철수를 3대째로 이어가며 가게의 40년 역사를 이어 나가게 됩니다. 그러나 1980년 박정희 대통령의 사망 소식과 신군부의 쿠테타로 인해 서울에서는 민주화 운동이 물거품이 되며 전라도 광주에도 어둠이 몰려듭니다. 시민들의 항쟁은 권력에 의해 무참히 진압당하며 결국 5.18민주화운동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어느 날 광주에 군사들이 내려오게 되고 집을 떠난 첫째가 빨갱이로 몰리면서 둘째 아들은 군에 잡혀가 고문을 받게 됩니다. 끌려간 둘째 아들 상두는 잘 모르는 일을 실토하라고 모진 고문을 받으며 고문의 여파로 다리를 절단하게 됩니다. 상두가 끌려간 사이, 같이 인사를 드리기로 했었던 상두의 예비 신부는 영문 모를 총에 맞아 사망하게 됩니다. 상두는 분노와 절망에 휩싸여 매일 술만 마시며 보내게 됩니다. 잠깐 휴전이 된 사이 광주 시민들은 무장하기 시작합니다. 이때 철수 아빠와 철수 삼촌도 무장에 참여하며 마을 총장도 무기를 들게 됩니다. 5월 26일 새벽 최후의 향전이 도청에서 열리게 됩니다. 철수 아빠, 철수 삼촌, 철수 이모, 철수 이모의 남자 친구까지 모두가 도청에 모인 뒤 철수 할아버지는 그들을 위해 짜장면 배달을 가게 됩니다. 즐겁게 짜장면을 먹던 중에 저항할 수 없는 폭격을 맞고 모두 사망하며 영화는 끝이 나게 됩니다.
화평반점 중국집
서울의 봄이 왔더라면 평생 꿈이었던 자신의 가게를 열심히 잘 운영하며 평범하게 살고 있었을 사람들이 눈먼 야만과 폭력 앞에서 어떻게 그 삶이 나락으로 굴러떨어지는 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영화 <1980>은 제목 그대로 1980년대 당시 시대가 다시 도래해 중국집 [화평반점]의 가족들과 주변인들 같은 상황에 노출될 때 우리 같은 평범한 시민들도 언제든 그 같은 무자비한 야만과 폭력 앞에 노출되어 희생당할 수 있다는 위험성을 보여준 것 같습니다. 이번 영화를 기획한 강승용 감독은 코로나 시국에 이 영화를 제작하게 되었는데 주변 여건이 좋지 않았기에 심각한 재정난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홍보비가 부족해 뉴스 공장과 다스뵈이다 등을 통해 홍보했다고 하며 텀블벅에서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시사회 장소도 겨우 마련했다고 얘기해주었습니다. 몇백억 예산을 들였다는 한국 영화가 넘쳐나는 시대이지만 이렇게 힘든 영화를 만든 감독이 있다는 것에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워낙 제작비를 최소한도로 제작했다 보니 그만큼 손익분기점 또한 30만 명 수준에 불과했습니다. 요즘 나오는 영화들은 보통 300만 명 이상의 관객이 봐야 겨우 손익분기점을 넘어선다는 사실에 비춰보면 얼마나 예산을 적게 들여 영화를 만들었는지 그만큼 제작비가 부족해 감독 아파트 담보까지 잡혀가며 영화를 만들었을까 싶었습니다. 하지만 다행히 현재 투자 대비 30만 명 관객을 넘긴 덕분에 성공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규모가 크고 캐스팅이 화려한 영화가 아닌 만큼 관객 수가 많지는 않지만, 이 영화는 올 초 흥행작이었던 영화 <서울의 봄>에서 그린 1979년 12.12 군사 반란 이후의 대한민국에 닥친 비극을 말해주고 있기에 그 당시 민중의 삶에 대해 알 수 있는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피해자분들의 모습들을 보여주기 위해 내면적으로 깊게 표현한 노력이 보였던 작품입니다.
가슴 아픈 이야기
전두환 전 대통령은 1979년 12.12 군사 반란을 일으켜 군대를 무력으로 장악한 뒤 계속해서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령을 전국 확대하며 입법, 행정, 사법 삼권을 장악하는 쿠테타를 결행하였습니다. 그러자 전남대에서는 학생들이 비상계엄령을 해제하라는 시위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전두환 전 대통령은 공수부대를 투입하여 무차별적인 폭력으로 진압하였으며 시위 학생들뿐 아니라 거리의 시민들까지 무차별 폭행과 살인을 하며 사상자들이 급증하기 시작했습니다. 가족, 이웃이 마구 살해당하는 충격적인 광경을 목격한 광주 시민은 일부 청년 중심으로 파출소 무기를 탈취하여 시민군을 결성하게 됩니다. 그런데 군사 정권을 지지하는 국힘 보수들은 바로 이 시민 저항군을 들먹이면서 5.18이 폭동이라고 그들은 주장합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통치 기간에는 언론이 모두 장악되었기에 계엄군의 살인 진압이 원인이 되어 광주 항쟁이 발생했다는 사실을 감추며 김대중의 사주를 받은 공산 세력들이 광주에서 내란 폭동을 일으켰기 때문에 진압한 거라고 거짓 뉴스를 보도하게 됩니다. 나중에는 김대중 내란 음모가 전두환의 조작이었음이 재판에서 밝혀졌습니다. 당시 국내 언론의 허위 보도와 달리 해외 외신에서는 전두환 신군부가 계엄령을 반대하는 광주 시민을 공산 폭도로 몰아 학살하였다고 진실 보도를 하였습니다. 전두환 신군부의 무차별 발포로 광주 민주화 투쟁은 일주일 만에 끝이 나게 됩니다. 그 후 민주화 이후 5.18의 진상이 밝혀졌는데도 전두환 전 대통령은 희생자에게 사죄하지 않으며 오히려 큰소리쳤습니다. 5.18 학살뿐만 아니라 7년 동안 통치하는 기간에도 독재에 반대하는 수많은 민주 학생을 전기 고문하고 허위 자백을 받아 간첩 빨갱이로 조작을 해 처형하였습니다. 민주화 이후 과거사위원회와 검찰 수사, 법원 판결을 통하여 모두 독재 정권의 간첩 조작, 용공 조작이었음이 밝혀지며 결국 1996년 내란죄와 살인죄 등으로 1심 사형선고를 받게 됩니다. 하지만 1997년 김영삼 대통령이 특사로 풀어주게 되며 구치소에서 2년 만에 사면 복권이 되어 풀려나게 됩니다. 우리나라와 달리 프랑스, 독일 등 선진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나치 독재 앞잡이들을 가혹하게 처벌하여 역사 바로 세우기를 하였습니다. 광주 민주화 운동은 희생자들의 헌신과 희생을 통해 대한민국의 민주화와 인권을 위한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국가의 민주화와 인권을 위한 노력을 잊지 않고, 역사적으로 기억해야 할 사건 중 하나입니다.